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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고 문옥주 20주기 추모전 기고]


문옥주 선생님의 정말 친구

 

최현정 /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문옥주. 1996년 모리카와 마치코 선생님이 기록한 문옥주 선생님의 증언집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문옥주 선생님을 만났다. 책을 읽은 때는 2016년 가을, 나는 나의 근거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일하러 가느라 기차를 타던 중이었다. 기차 속에서 증언집을 읽었다. 마치 바로 옆에서 문옥주 선생님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느낌이었다. 기차를 탄 내 몸이 앞뒤로 흔들릴 때마다, 마치 어린 선생님이 내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어린 옥주가 고향 가는 기차 안에서 혹여 들킬까 무서워 숨죽여 있을 때, 혹은 기차 안에서 노래 부르고 사람들과 웃고 있을 때의 모습이 마음 안에 펼쳐졌다.

어린 옥주의 노랫소리는 어땠을까. 어린 옥주의 웃는 모습은 어땠을까. 호기심에 찬 그의 얼굴은 무슨 표정이었을까. 사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마지막 고향가기 직전에 옥주는 사진을 모두 불태웠고 나는 사진을 볼 수 없게 됐다. 나중에 나이가 더 들었을 때의 사진을 보며 문옥주 선생님의 음성과 몸짓을 짐작해 본다.

문옥주 선생님은 세상에 일본군 위안부의 실태를 밝힌 한국의 두 번째 증인이다. 모리카와 미치코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증언집을 5년 뒤에 출판할 수 있었다. 한국어로 이 증언집이 번역된 때가 2005년이었고, 지금은 2016년이니, 내가 글로나마 문옥주 선생님의 이야기를 전해 받은 건 그의 증언 이후 한참이 지나서다.

 

나와 옥주 사이

아기 옥주가 세상에 태어나고 60년 정도 흐른 뒤에 내가 태어났다. 옥주의 아버지는 양반집 아들로 일제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을 했었고 일찍 가족 곁을 떠났다. 나의 아버지는 평범한 농가의 아들이었고, 독재 정권 하에 경제 성장을 명분으로 채찍질 받았던 70년대 회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옥주의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잃고 큰 딸을 멀리 시집보내고, 남은 세 자식을 키우는 자존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자존심을 지키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옥주 어머니의 덕()이었다. 나의 어머니 역시 두 자식을 키우고 집안 경제에 보탬이 되느라 젊은 시절을 보냈고, 집안을 잘 꾸리는 것이 그의 덕이었다.

십대 옥주가 살았던 시기는 1930년에서 40년대 사이였다. 옥주는 궁핍하고 억압받는 시절 가난한 집의 딸로 가족들이 먹고 살 길을 헤쳐 나가야 했다. 옥주는 스스로 책임감이 강했고, 남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남들이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더 당연한 사람이었다. 옥주는 엄마를 끔찍이 생각했었고, 엄마를 대신 해 집안 경제를 책임지는 것이 옥주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나는 엑스세대라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말이 우리 세대에게 이름 붙여진 시기에 성장했다. 슈퍼우먼이 되는 것이 나의 세대 여성의 덕이었고 어린 나의 목표이기도 했다. 우리 집은 굶을 정도로 가난하진 않았지만, 나의 엄마는 50년대 태어나 옥주와 유사한 성역할을 학습해온 세대였고, 가정을 잘 지키는 자신의 역할과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엑스세대 사이에서 묵묵히 자신의 과도기적 성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여성이었다. 아버지는 90년대 경제 위기를 인내하느라 건강을 잃었지만, 역시나 그 인내심이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나 역시 부모를 끔찍이 생각했기에, 부모를 봉양할 수 있는 자식이 되고자 좋은 일자리를 갖고 싶었다.

옥주의 부모님과 나의 부모님 사이, 그리고 나와 옥주 사이에 한참의 시간이 흐른다. 그런데 자신이 다른 세대를 살고 있는 여성에게 영감을 주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십대 옥주는 알았을까. 시대의 압박을 버텨내고, 살아남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덕을 지키며 살아가던 옥주의 삶이, 역시나 자기의 덕을 지키려 애쓰는 후세대 여성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한 여성이 당당한 뼈대를 지닌 자기 이야기를 후세대에게 말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전해지는 힘을. 그렇게 이 힘이 후세대의 여성과 연결되어 영감을 주었다는 것을, 어린 옥주는 알았을까.

 

옥주는 살았지만 나는 죽었을지 모른다

기차를 타고 있는 나는 마치 어린 옥주가 된 것만 같았다. 나도 내 삶을 꾸려나가는데 의지가 아주 강한 사람이니, 내가 만약 과거에 태어났으면 옥주처럼 세상에 적극적으로 돌진했을 것이고, 그러다 속았을 거다. 친구 집에 놀다 가는 길에 위안소로 끌려갔을 거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옥주처럼 열심히 노래를 외우고 ‘1등을 하기 위해노력했을 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었을 것이다. 살아서 부모에게 돌아가자. 어떻게든 살아남자. 엄마에게 멋진 핸드백을 선물해주자.

물론, 옥주만큼의 기지는 내게 없는지라 아마 나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을 거다. 대신 내 발로 강에 뛰어들거나 결핵으로 죽은 옥주의 친구가 되었을지 모른다.

나는 어쩌다 후세대로 태어나 트라우마를 다루는 심리학자가 되었다. 그래서 문옥주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쓰도록 초청받았다. 나는 트라우마 분야의 심리학자로서, 그런데 그 전에 한 여성으로서, 그리고 문옥주 선생님의 후세대 한국 여성으로서 글을 쓴다. 이 곳에서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다행히 죽지 않았기에.

 

옥주의 도전

시간의 흐름 바깥에 서서 한 사람의 인생 역사를 평가하기란 너무 쉽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이 역사를 살아가는 첫 사람이라면...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니라 신일 테다. 사람이라면 그저 생존의 본능에 따라서 주어진 시간을 헤쳐 나갈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참혹한 시대 어린 옥주가 어떻게 자기 인생을 구축해 나갔는지가 너무도 놀라웠다. 지금 나는 내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세상을 개척하며 살 수 있나? 옥주의 엄마는 품위 있는 분이었지만 그 만큼 생활력은 없었다. 그래서 집안에서 생활력을 발휘해야 하는 사람은 옥주였다. 옥주는 일곱 여덟 살이 되기도 전에 이웃집을 돌거나, 남의 집 일을 돕거나, 음식을 팔면서 집안에 먹거리를 가져다주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았기에 공부를 좋아했지만, 돈이 없어 더 공부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돈도 벌 수 있는 기생 공부는 옥주의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아주 훌륭한 공부였다.

 

당시에 여자의 몸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가업을 돕거나, 기생이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몸을 파는 창부가 되는 것 정도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어린 아이였던 내가 기생이 되어서라도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당연한 발상일지 모른다(p. 40).”

 

나는 어린 옥주가 기특했다. 그 시절의 여성으로서 세상살이에 도전하려는 옥주. 아마 오늘날 살았다면 정말 멋진 여성예술인이 되었을까. 하지만 오늘날에도 예술인이 되려면 잔혹한 착취 체계를 목격하지 않을 수는 없다.

기생 공부가 좌절되자, 옥주는 일본에 간다. “발톱 끝까지 바짝 세워서 키가 크게 보이게 한 후, 어른 같은 말투로 누가 보더라도 혼자서 일본에 가는 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되도록 연기했다(p.42).” 일본행 허가를 받아낸 옥주의 기지였다.

옥주는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서 일본의 부산관에 취직하지만, 쉴 틈 없이 일해야 했고, 아마도 나중이 되면 성매매를 강요당할 그런 상황이었다. 옥주는 또 다시 기지를 발휘해서 부산관에서 도망을 친다.

그리고 3년 뒤, 헌병에게 붙잡혀 만주로 강제 연행된다. 16세였다. 문옥주 선생님은 당시의 공포를 이렇게 설명한다. “꼭 죽을 것만 같았다(p.51).” 옥주는 만주 동안성에 도착하고 나서 바로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다른 이야기와 달리, 문옥주 선생님은 단 두 줄로만 이 시기의 심정을 표현한다.

 

매일매일 울었다.

그러나 울어도 울어도 남자들은 왔다.” (p. 52)

 

얼어붙은 겨울

울어도 울어도’, ‘울어도 울어도’, ‘울어도 울어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곧 이어, “얼마 안 있어 추운 겨울이 왔다(p.53).”

이 시기가 지나고 나서 옥주는 더 이상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됐다.

군인들이 표를 두 세장 씩 겹쳐서 주면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매일매일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내고자 애를 썼다. ‘위안소가 습격을 받아 총탄이 날아들 때, 옥주는 웬일인지 나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p. 55)”고 했다. 하지만 옥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 그렇구나. 조심하자(p.55).”

옥주는 겉으로는 가장 인기 있는 위안부였다. 노래도 잘 부르고, 말도 잘하고, 나약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로 무섭지 않았기 보다는, 아마도 첫 번째의 추운 겨울과 함께 옥주는 얼어붙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속으로는 수도 없이, ‘조심하자면서 자신을 다독였을 것이다.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옥주만의 살아남는 지혜였다.

17, 옥주는 고향으로 도망쳐 온다. 역시나 그 기지로. 그리고 18, 다시 세상에 도전한다.

 

나야 어쨌든 시집도 못 갈 테니까 차라리 돈을 많이 버는 쪽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는 조선인도 다들 앞 다투어 안정적인 일본군이 군속이 되고 싶어했다. (p. 65)”

 

일본군 식당에서 일하기 위해 옥주는 친구들과 배를 탄다. 부산항에서 출항한 배 안에서 옥주는 급작스러운 슬픔과 후회에 울음이 터진다. 어쩌면 속아서 위안소로 간다는 것을 배에 타기 전에도 이미 짐작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짐작이 되더라도 발길을 돌리는 것은 옥주에게 쉽지 않다. 옥주는 배 안에서도 뱃멀미를 하는 사람들을 돌본다. 자신은 고되더라도 타인을 보살피는 사람이 옥주다. 가족을 생각하며 옥주는 발길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버마에 도착해 그곳이 삐야(위안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다 지친 옥주는 다른 이들이 계속 울어도 자신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얼마를 울든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p 77).” 옥주의 눈물이 다시 얼어붙었다. 나중에 선생님은 증언한다. “그 시절 나는 사람이 아니었어(p.186).” 하지만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해 몸은 얼어붙어야 했을 것이다.

 

살아남는 요령

이후 옥주는 자신을 찾아온 병사에게 연민을 느끼고, 요령을 키우고, 일본 병사와 사랑에 빠진다. 야전 우체국에 저금을 시작한 것도 이 때다. 옥주는 저금을 하면서 어머니가 편하게 생활하는 날을 꿈꾸었다. 히토미는 망고 알러지가 있는 데에도 망고를 좋다며 계속 먹었다. 옥주는 밤 맛 열매를 좋아했었다. 이것이 옥주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 이 시대에 여성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버마에서 6개월이 지나고 옥주는 최전선 아키압으로 이동한다. 3개월 간 옥주는 야수와 적군의 공격으로 죽음이 임박한 전쟁터를 거쳐 간다. 이 시기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친구가 강물에 뛰어들고, 결핵에 걸린 아키미 언니가 죽어 옥주가 정성스레 화장한다. 언니가 잘 타지 않아 옥주가 고생을 했다. 이 날 이후로 옥주는 불고기를 먹지 않게 됐다.

전쟁터로 얼룩진 길에 옥주 무리는 한 조선 여성을 만난다. 독립운동가 남편을 두어 버마에 남겨진 여성으로, 분명 조선인이지만 조선말을 못하고 버마인 모습이었다. 그 만남을 문옥주 선생님은 왜 기억하고 있을까. 그곳은 산중의 참외밭이었고 희귀하게 맑은 물이 있어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조선말을 못하는 여성은 옥주 무리의 조선말을 듣고 격렬하게 운다. ‘영락없이 버마 사람이지만 얼굴형은 정말 조선인60세 할머니. 문옥주 선생님이 구술할 당시가 60대였으니, ‘위안부의 정체성으로 외로운 인생을 살아온 선생님에게 버마사람이 돼 고향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린 조선 할머니의 기억이 더 선명해졌을 테다. 선생님 당신도 수십년 동안 아무에게도 자기 경험을 드러내지 못한 채,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의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일까. 선생님도 구술을 끝내고 격렬하게 울음을 터뜨렸을까.

치열한 전쟁이 지속되는 중에 전쟁터 속에서 옥주는 이후 약 3년 동안 위안부생활을 한다. 공습과 죽음이 일상이 된 곳에서도 옥주와 여성들은 위안부 일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위안소는 폭격 당하지 않았다(p. 113).” 옥주는 이 시기에도 무서움이 없어서 추락한 영국군의 시신이나 비행기를 구경 가기도 했었다. 원래 호기심이 많았는데 공포심도 젖혀 둔 상태니 신기하게 구경했을 테다. 하지만 이 시절을 증언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마치 꺼져버릴 것만 같은 작은 목소리(p.186)’ 였다. 무서웠음이 틀림이 없다. 얼어붙어 목소리마저 사라질 것만 같이 생명이 위협당하는 공포를 겪었음이 틀림이 없다. 하지만 선생님은 살아남았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남겼다.

 

죽음을 거쳐 온 사람의 자부심

랑군으로 이동해 공습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옥주는 저금통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폭격이 계속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전략을 세운다. 사이공에서 고향 가는 배를 타려던 중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환영이 나타나 배에 타지 말라고 전한다. 나중에 옥주는 그 배가 침몰했다고 알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옥주는 가지 못했다.

옥주는 다시 랑군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사이공에서 일본군 파일럿에게 접근한다. 다들 무서워했지만 옥주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무서워도 안 무서운 척 해야 했을 것이다. 옥주와 친구들은 사이공에 잠시 머물러 위안부생활을 하고, 그 덕에 랑군에 갈 수 있는 증명서를 받게 된다.

도망쳐야 하는 순간마다 옥주와 친구를 살린 것은 옥주의 겁 없음과 기지였다. 사이공에 머물렀던 시기, 어느 날의 순간이다. 프랑스산 레인코트에 악어가죽 핸드백을 걸치고, 하이힐을 신고 사이공을 활보한 그 때는 젊은 옥주에게 가장 자신 있는 순간이었다. “아마 누가 보더라도 내가 위안부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p.133).” 죽음을 거쳐 온 사람의 자부심. 살아남을 수 있었던 자신의 기지를 마음껏 뽐낸 순간이었으리라. 나는 젊은 옥주가 그 순간을 더 오래 누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문옥주 선생님이 그 순간을 진술할 때 그리움과 자신만만함을 다시 느끼셨다 하기에 반갑고 고마웠다.

죽음의 순간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순간 역시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힘을 증명한다. 그 힘이 있었기에 그 시간을 살아오셨을 것이다. 심리치료 장면에서 이런 순간은 꽃으로 상징된다. 고통뿐인 줄로만 알았던 삶에 꽃과 같은 순간의 발견은 구술의 당사자에게는 빛나는, 이를 기록하는 증인에게는 감사한 순간이다.

 

목숨과 존엄

일본군이 조센삐라고 모욕하면 옥주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키압에 있을 당시에는 모욕하는 일본군에게 되받아치다가 2층에서 일본군이 미는 바람에 떨어져 심하게 부상당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돌아온 랑군에서는 조센삐 주제에라고 하며 옥주에게 칼을 들이대는 일본군에게 옥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칼은 천황 폐하로부터 받은 거잖아. 적에게 향할 것을, 왜 이렇게 험하고 먼 곳까지 당신들을 위안하러 온 나를 향해 겨누는 거야. 조센삐, 조센삐 하며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우리들 조선인도 일본인이고, 일본인이 되었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그렇게 바보취급 하다니 조선을 일본에서 떼내서 독립시킬 자신이라도 있는거야(p. 137).”

 

이 말에 칼을 휘두르는 일본군을 몸으로 밀친 옥주는 바로 그를 칼로 찌른다. 옥주는 이 일로 군법회의에 넘겨지고, 버마와 조선인들이 옥주의 석방 운동을 돕는다. 옥주는 정당방위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문옥주 선생님은 그 당시 단계가 낮은 인간이라는 취급을 받으면 이상하게 속이 상하고 감정적으로 되었다고 증언한다. “지금 생각하면 뭐 그렇게 심각하게 반응할 말도 아닌데 말이다(p.139)”하고 선생님이 읊조렸던 모양이다. 그 당시 존엄이란 옥주에게는 생명과도 같이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니 목숨처럼 지켜야 했을 것이다. 옥주는 간호부 일을 하면서도 일본 적십자 간호사들이 자신들을 절대로 업신여기지 못하게 했다.

공포로 몸은 얼어붙었지만, 옥주의 영혼은 당당하고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60대 여성의 인생사를 기억하기를

시간 소용돌이를 벗어나 자신의 생존사를 이야기하는 문옥주 선생님의 구술에서 나는 대단한 힘을 느꼈다. 그래,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 이야기할 때 이와 같은 강단을 가지고 이야기 해야지. 96년 모리카와 미치코 선생님은 구술 기록을 출판하면서 이 책이 젊은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기를 기대했다 하는데, 그의 말이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문옥주 선생님의 힘과 기지가 왜곡되어 읽힐 여지에 대해 염려스러웠다. 목숨과 존엄이 언제라도 박탈당할 수 있는 억압의 시대에 여성이 주도한 도전, 생존을 위한 선택과 자기 옹호의 진술이 여성으로 이 시간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의 눈에 어떻게 읽힐지 말이다. 하지만 어린 옥주와 60대 여성 문옥주 선생님은 같은 사람이니까 당연하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사회에 들려주었다. 이 목소리 자체가 나는 젊은 여성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라 생각한다.

해방 이후 문옥주 선생님의 삶은 이어진다. 이후의 삶이 해방 전의 인생처럼 로 기술된 증언이면 좋았을 것을. 단지 위안부로서 살아온 시기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낸 여성의 전체 인생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기생이 돼 살면서 가족을 끝까지 보살피고 다른 사람의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키웠던 삶이 이어진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어떻게든 지키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지녀온 선생님의 가치였다.

 

고통의 망각을 거부하다

91년 선생님은 사회에 나서 위안부로서 자신의 인생을 증언한다. 그리고 많은 친구들이 그를 비난하고 떠난다. 세상은 우리 민족 여성이 일본군에게 침해 당했다는 점에서 위안부경험에 함께 분노하기도 하지만, 이 사회에서 여성 당사자는 성과 관련된 경험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비난과 수치감에 고립되기 쉽다.

위안부삶 이후의 삶이 그래서 더 조명받기를 바란다. 침해받은 순수한 소녀의 이야기는 물론, 이 시기 전쟁이 여성의 신체와 인간성에 끼친 해악을, 식민 시기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여성의 몸과 존엄에 대한 침해를, 한국 여성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그 조건들이 소녀에서 나이를 먹어간 한 여성의 삶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사회가 경청하고 기록하기를 바란다.

선생님은 (너무도 선생님답게) 여성을 향한 이러한 해로운 역사의 반복을 직시했다. 자신의 경험을 역사의 한 단면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슬픈 역사가 새겨진군사우편 저금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아무리 힘있는 자가 행패 부리는 역사일지라도, 단 한 명의 여성이라도 그 삶이 희생되거나 고통스러운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망각될 수는 없다는 선생님의 정당한 요구이자 선언이었다. 이런 선언이란 살아남은 자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챙기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행위이며 따라서 치유를 상징하는 행위다. 나아가 선생님의 통장은 그 시대 여성의 고통의 기록과도 같은 유산이었다. 선생님은 역사에 우리들의 존재를 제대로 남겨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p.182)’ 하길 원했다. 이것은 전쟁으로 고통받은 자의 정당성과 인권을 되찾는 동시에 고통의 역사를 단절하고자 하는 투쟁이기도 했다.

 

정말 친구

위안부 일을 알면서도 친구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친구야(p.181).” 우리는 역사 속에서 고통 받았던 여성들의 정말 친구인가? 아마도 선생님은 고통받은 이들의 정말 친구가 되어 손 잡아주기를 희망하셨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세상의 고통 속에서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려고 한다. 나는 생존자의 정말 친구가 되고자 노력하는가. ‘정말 친구였던 모리카와 미치코 선생님의 경청이 문옥주 선생님의 불면증을 사라지게 했듯이, ‘정말 친구로서 당신의 경청과 응답은 끝없는 어두움 속에서도 평온한 잠을 청하는데 도움이 되는 달빛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