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womenlink.or.kr/nxprg/board.php?ao=view&ss[fc]=10&bbs_id=main_data&page=&doc_num=4034 

 

 

 

폭력, 그 공포와 고독에 대처하는 자세

- 수원에서의 외로운 죽음을 위로하며.


최현정●임상심리전문가/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

 

 폭력 경험에서 가장 오래도록 남는 기억은 가해가 이루어진 신체적인 고통의 순간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남는 기억은, 고통에 빠져있을 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기억,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었다는 절대적인 절망감이다. 어떤 경우에는 도와주기는커녕 외면당했다는 배신감이다. 공포의 체험은 고독과 뒤엉켜 괴물같이 달라붙는다. 훗날에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것은 바로 이 뒤엉킴이다.

절대적 고독에서 서서히 일상으로 복귀하는 아주 먼 길에서, 지난 4월 초, 우린 또 다른 누군가가 고독 속에서 죽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수원에서 전해진 죽임에 관한 소식이다. 그 소식에 또 다른 누군가는 며칠동안 기억의 괴물과 함께 싸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그러한 냉랭함 속에서 죽어갔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더 아팠을 것이다. 세상은 별로 안전하지 않으며,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고독의 기억을 이 사회는 씻어 내주지 못했다. 세상이 안전하기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독과 공포의 뒤엉킴만은 겪게 하지 말자. 이번 수원 사건에 대해 경찰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저런 뉴스를 보아하니 새로운 인력을 배치하고, 일 잘하면 상을 주고, 책임감이 많은 사람들을 앉히겠다고 한다. 의구심이 든다.

폭력의 본질과 폭력에 대면한 사람의 반응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나는 그동안 강의나 글을 통해서, 매일 고통을 직접 겪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고통에 익숙해지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것과 고통을 잠시 참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는 과정에 대해 말해 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들을 도와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추가하고 싶다.

몇 해 전에 나는 매우 무딘 사람이 될 위기에 처했었다. 매일 듣는 이야기가 아픔이니, 아픔을 새롭게 느끼기가 점점 어려워졌던 거다. 타인의 고통이 내 안에 차고 넘쳐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먹먹함. 심지어는 상대의 아픔이 최고조에 달해 그것을 보듬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더욱 더 무뎌지려 애쓰는 ‘나’를 발견했다. 끔찍함이 익숙해졌다. 아마도 익숙해야 내 몸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겠다.

고통이란 것이 그렇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마음의 작동이 있다. 그 때 내가 살아남으려면 더 이상 타인의 고통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더 이상 위협받지 않도록 하려면, 느끼기를 멈춰야 한다. 그리고 내 세상을 굳건히 걸어 잠가 어떠한 위험도 발들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물론 내게는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위기였기에, 그 상황을 타파하고자 애를 썼다. 다행히 나는 적절한 도움을 받았고, 고통을 담아내는 단단한 두발이 때로는 까치발을 들어 희망을 볼 수도 있어야 함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적절한 도움을 받기란 쉽지 않다.

사람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의사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들어왔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직업인데도 죽음을 가까이 해야만 하는 의사들에게 죽음을 숭고히 여기는 장의사처럼 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의사라면 멱살이라도 잡겠지만 그 주치의가 내 자식이라면 너무 많이 슬퍼하지는 않았으면 좋지 않은가.

그렇다면 매일 폭력의 현장을 대면하는 경찰들은 어떠할까. 매일을 죽음과 폭력에 맞서야 하는 사람들에게 매번 죽음과 폭력을 생생하게 느끼라 말할 수 없다. 사람은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본분을 지키지 않을 지경이 되어, 하나의 생명과 그 주변의 생명에게 막대한 고통을 초래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우리 사회가 폭력과 고통의 본질에 대해, 폭력과 고통에 대한 사람의 반응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면 무뎌지고 둔해지기 마련이다. 새로운 인력도, 상 받으려던 사람도, 책임감 많은 사람도, 무뎌진다. 무뎌지고 메말라서 그 자신의 생생한 인생마저 딱딱해져버리고 만다. 타인의 고통이 가벼운 껍질이 되어서 대수롭지 않아진다. 가벼워지지 않는다면 그 자신이 소진되고 말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진을 방어하는 그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건 그는 고통 속에 남겨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에 대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무시한 채 폭력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에게 지울 수 없다. 우리가 손봐야 할 것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나 그 고통을 도와줄 임무가 있는 사람에게 모든 짐을 얹어버리고 마는, 폭력의 본질에 무지한 체계에 있다.

 

폭력 앞에 사람은 취약하다. 경찰 체계는 이를 알고 있어야 한다. 폭력을 반복적으로 목격하는 것은 직접 경험하는 것만큼 치명적이다. 무뎌지는 것은 그 후유증이다. 100년에는 전쟁터에서 후유증을 보인 군인들에게 의지박약이라 비난하면서 불명예를 가했다지만 지금은 후유증에 대한 원리와 대응책이 충분히 밝혀져 있다. 사람의 고통 앞에 생생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경찰이 되려면 경찰들이 겪게되는 소진과 스트레스에 대한 대비책이 체계 안에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가벼운 껍질로 고통을 축소하는 태도를 꼬집을 수 있는 이해와 교육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비와 이해가 부재한 경찰이 폭력에 맞닥뜨린 시민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을 리 없다.

나는 매일 사람들이 겪은 고통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를 나누며 그 아픔 속에 같이 머물러 있는다. 나와 함께 보다 생생하게 그 아픔을 나누도록 하여, 나 없이 혼자 있을 때에 다시 그 이야기가 떠올라도 예전만큼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아픔을 함께 나누는 동안, 서로에 대한 믿음과 감사가 감동을 줄 때도 있다. 겪을 이유가 없었던 참혹함을 겪었음에도 희망을 떠올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 인간이었던가를 겸허히 받아들인 뒤에 용기 있는 발걸음을 떼는 사람들도 보았다. 이어 나도 용기 내어 나 자신의 초라함을 보듬어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 가슴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으로 다시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되었음을, 내 단단하게 굽은 등허리에 의지할 수 있었음을 그들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만남을 통해서 사람들도 나도, 서로 조금씩 더 강해졌다. 그렇지만 세상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또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도 이미 목격하였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세상이란 보이는 대로 잠잠하지만은 않다. 때로는 평소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인내해야만 몸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앞으로 남아있는 나의 인생은 조금 더 안정하고 조금 더 평화로울지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와 희망이다.

때론, 세상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 가는 심리치료의 과정이 참 무색하기도 하다. 세상이 당신을 혼자 죽어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임을 실제로 보여 주기를 희망한다.